국회의원도 '파이어족'이 필요하다

입력
2024.03.1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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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진 운전기사 활용 금지, 엄격한 근퇴 관리하면
공천권 활용한 의원 줄세우기 사라질 듯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국회의원 배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회의원 배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가와 사회에 마지막으로 봉사를 한다는 마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일신의 영달이 아닌 국가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어렵게 출마를 결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당의 공천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을 보면 정말 그런 건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낙천하면 삭발이나 단식 같은 극단적 수단을 동원해 불복하거나 정치 인생 내내 몸담았던 당을 떠나 정반대 이념의 당으로 거리낌 없이 달려가는 정치인들이 있다. 봉사할 기회를 놓쳐서 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

젊어서 많이 벌고 일찍 은퇴해서 편안한 노후를 즐기겠다는 '파이어족'(경제적 자립 후 조기 은퇴)을 꿈꾸는 이들이 정치권 밖에는 적지 않다. 정치권은 반대다. 여야의 4선 이상 현직 의원 33명 가운데 이번 선거 출마를 애초에 포기한 사람은 3명(김진표 국회의장, 박병석·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뿐이다. 최소 16년 이상 배지를 달고도 열 명 중 아홉 명은 여전히 "한 번 더"를 외치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본 국회의원이란 직업은 물론 힘든 점도 있다. 민원이 끝이 없고 명절 등 대목에는 주말 없이 지역구 행사를 돌아야 한다. 가족들이 자칫 정치적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상쇄할 당근도 크다. 선수(選數)가 쌓일수록 의원들은 어린아이처럼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보좌진의 의전을 받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혼자서는 승용차 문을 여닫거나 모바일 뱅킹을 사용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의원들은 담당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의 소관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 유관 민간 기관에 '슈퍼 갑'이다. 입법과 예산은 물론 민간 기업 대표의 국정감사 출석 여부를 결정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로펌이나 규모 있는 기업에서 국회를 상대하는 대관(對官) 담당자가 예전보다 많이 늘었다고 한다. 정부와 비교해서도 의회 권력이 부쩍 커졌다는 방증이다.

의원 특권을 줄이자는 주장이 이어지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세비 삭감과 의원 정수 축소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엔 맹점도 있다. 의원 수를 줄이면 남은 의원들에게 권한이 더 집중돼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한은 더 커진다. 세비를 확 줄이면 검은돈을 받고 싶은 유혹이 커지거나 금수저 출신 의원들만 늘어날 수 있다.

의원직을 보람은 크지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고된 일자리로 만드는 건 어떨까. 다음은 정치권 관계자들이 말하는 제안이다. 보좌진은 차량 운전기사로 쓸 수 없게 엄격히 제한한다. 의원의 대중교통 이용을 독려한다. 보좌진을 지역구 관리나 선거운동에 동원할 수 없게 한다. 본연의 업무인 법안 심사에 충실하도록 국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게 한다. 특히 민간 업체와 접촉하면 기록을 남기게 의무화한다. 다선 의원이 될수록 임금이 줄어들게 설계한다.

이런 국회가 된다면 공천 불복 소동은 옛이야기가 될 것 같다.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가 공천권을 무기로 의원들을 줄세우는 데서 비롯하는 패거리 정치도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지도부가 일 잘하는 의원들을 찾아가서 '제발 그만두지 말고 한 번 더 출마해 달라'고 부탁하게 될지 모른다.

이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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