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를 입에 올리지 않는 나라

입력
2024.03.28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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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낙태)권을 보장한 판례를 폐기한 가운데, 당시 미 텍사스주(州) 오스틴에서 낙태를 지지하는 한 여성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오스틴=AFP 연합뉴스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낙태)권을 보장한 판례를 폐기한 가운데, 당시 미 텍사스주(州) 오스틴에서 낙태를 지지하는 한 여성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오스틴=AFP 연합뉴스

하루가 멀다 하고 '임신중지(낙태·abortion)'를 입에 올리는 미국의 두 대선 후보에 대한 '간접 참관기'를 써보려 한다. 세계의 낙태 이슈를 수시로 접하는 국제부 기자로서, 낙태를 경험할지 모르는 가임기 여성으로서, 4·10 총선(이전 대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을 앞두고 낙태의 'ㄴ'자도 듣기 힘든 한 나라의 유권자로서.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 대통령. 그는 올 11월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낙태 이슈에 민감한 여성 등 진보 유권자 표 단속에 어느 때보다 열심이다. 최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미네소타의 한 낙태 전문 병원에 보냈을 정도다.

바이든은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1973)' 복원까지 약속한다. 2022년 미 연방대법원이 50년 만에 폐기한 걸 되돌려 놓겠다는 것이다. '백전노장' 대통령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해 중간선거에서 중도·진보 유권자들이 결집한 결과, 민주당은 상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지켰다. 로 대 웨이드 폐기 후폭풍이었다. 요즘 81세 미 대통령은 "생식의 자유는 투표용지에"란 말을 달고 산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임신 15주 이후' 낙태 금지 지지를 공식화했다. 낙태와 관련해 구체적인 숫자(주수)까지 제시한 건 처음이다. 그는 재임 시절 자신이 연방대법원을 보수 우위로 재편한 덕에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됐다며 이를 치적으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당시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고전하자 낙태에 관해 말을 삼갔다. 하지만 대선 후보 확정 이후 다시 낙태 이슈에 도전장을 냈다.

낙태는 나라를 두 쪽 내는 힘을 가졌다. '낙태는 살인이다'와 '여성의 결정권이 먼저'는 현재로선 타협 불가의 가치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계속 싸운다. 우리와 다른 게 있다면 정치권이 앞장서 싸운다. 선거가 다가오면 낙태를 대놓고 정쟁 도구로 삼는다. 낙태에 관해선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이 아닌 미분열국(the Disunited State)'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살벌하게 쪼개진다. 극한 대립과 분열이란 부작용도 크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낙태는 '살아 있는' 이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재차 맞붙는 조 바이든(왼쪽 사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재차 맞붙는 조 바이든(왼쪽 사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우리는 어떤가. 2019년 헌법재판소가 형법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5년이지만, 보완된 게 없다. 헌재가 대체 입법 시한으로 정한 날짜(2020년 12월 31일)도 흘려보냈다. 낙태를 범죄로 처벌하지 않지만, 관련 입법 공백 탓에 낙태 가능 시기와 비용은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낙태를 결심한 여성을 위한 '공식 정보'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국회의 책임이고 정치권의 직무유기다.

치열하게 싸우고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과, 침묵하고 방치하는 건 다르다. 최근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를 헌법에 새겼다. 1975년부터 임신중지권이 법률로 인정돼 왔지만, 이 권리가 더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다. 헌법 명시 자체보다 반세기 동안 낙태가 살아 있는 이슈였던 것이 더 놀랍다. 지난해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여성단체의 외침이 새삼 따갑다. "우리는 더 이상 비밀이고 싶지 않다."

조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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