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위해" "잘못 고치러"... 투표해야할 2966만 가지 이유가 모였다

입력
2024.04.10 18:30
수정
2024.04.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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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이 말한 '내가 투표하는 이유']
부모 휠체어 밀고, 고사리 손잡고 한표
"상식 통하는 세상" "미래 걱정" 한마음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투표소에 시민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승엽 기자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투표소에 시민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승엽 기자


"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신데도 꼭 투표하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휠체어로 직접 모시고 왔습니다."

10일 오전 서울 송파구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박모(58)씨는 경기 고양시에 산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에 본인 투표를 마친 뒤, 한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송파구 문정동에 사는 아버지를 모신 다음 근처 투표소를 찾았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 펴느라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박씨는 "아버지가 '예전부터 대한민국 국민이면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씀하셨다"라며 "같이 맛있는 점심이나 먹으려 한다"고 웃었다.

4년 만에 돌아온 국회의원 선거(총선) 본투표일인 이날 전국 각지 투표소에는 이른 새벽부터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러 온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정권심판론'과 '거야심판론'이 각각 뚜렷했던 만큼 사전투표율은 역대 총선 중 최고를 기록했고, 본투표에도 직전 총선보다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소로 몰렸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부터 연인·가족과 함께 나선 이들은 한목소리로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이번 총선 최종 투표율은 67.0%로, 전체 유권자 4,428만11명 가운데 총 2,966만2,313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아이에게 보여줄 훌륭한 현장교육"

10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투표소에서 한 반려견이 투표소에 입장하는 유권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승엽 기자

10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투표소에서 한 반려견이 투표소에 입장하는 유권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승엽 기자

이날 한국일보가 서울 강남·광진·서초·성동·송파·용산구 등의 주요 격전지 투표소 12곳을 둘러보니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를 찾은 시민들로 입구부터 북적댔다. 따뜻한 날씨에 잠에서 깨자마자 편한 차림으로 집 앞 투표소까지 발걸음을 옮긴 이들이 대다수였다. 나들이 복장을 한 채 가족, 연인들과 투표소를 찾은 이들도 있었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온 자영업자 30대 박모씨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경제도 안 좋고 가게 운영하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며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지팡이를 짚고 성수동 투표소에 온 나모(77)씨는 "지난번 선거에서의 내 실책을 바로잡기 위해 불편한 다리를 끌고 나왔다"며 "본인에겐 관대하고, 상대와는 대화하지 않는 정권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광진구 성수동 투표소에서 만난 임모(50)씨는 "시어머니, 아들, 남편과 함께 투표소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며 "가족들이 다 함께 투표하러 오는 게 우리 집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반려견 '쫑이'와 함께 왔다는 김모(55)씨는 "집 근처 산책할 겸 같이 나왔는데, 강아지를 안고 함께 기표소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점심 이후에도 유권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생후 6개월이 갓 지난 아이와 함께 온 양모(31)씨는 "아이를 낳고 나니 이전보다 부쩍 책임감이 느껴졌다"며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니까 부모로서 좋은 나라, 좋은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딸, 아내와 함께 광진구의 한 투표소를 찾은 하모(41)씨는 "아이에게 투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함께 왔는데 누굴 뽑았는지는 부부 사이에도 비밀"이라며 웃었다.

그동안 '보수 텃밭'으로 불렸으나 이번 선거에서 경합 선거구로 분류되기도 했던 강남3구(서초·강남·송파) 주민들도 삼삼오오 투표소를 찾았다. '강남을'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대학원생 이모(26)씨는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투표를 했다"며 "이번엔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투표가 종료되는 오후 6시를 앞두고선 허겁지겁 투표소에 방문한 이들도 눈에 띄었다. 임시공휴일이지만 가게를 운영하느라, 취업준비를 하느라 뒤늦게 한 표를 행사하러 온 이들이었다. 투표 종료 20분 전 투표소에 도착한 김모(84)씨는 "공사장 일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급히 왔다"며 "용산구에서만 60년을 살았는데, 내 고장 일꾼을 뽑는 데 빠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라

10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투표소에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유진 기자

10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투표소에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유진 기자

18세 이상 전 국민이 참여하는 '최대 정치 이벤트'인 만큼, 전국의 몇몇 투표소에서는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한 유권자가 기표소 안에서 투표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다 적발돼 본인 동의를 받아 사진을 삭제했다. 술에 취한 시민이 투표소 앞에서 소란을 피워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

광주의 한 투표소에서는 50대 남성이 투표용지를 찢는 소동이 벌어져 지역선관위가 고발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남성은 어머니 투표를 도와주기 위해 기표소에 함께 들어갔다가 선거사무원에게 제지당해 모친의 투표용지를 찢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직선거법상 스스로 기표하지 못하는 장애인을 제외하고 2인이 동시에 기표소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선거인 책임으로 훼손된 투표용지는 다시 교부 받을 수 없고 고의로 훼손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투표소를 잘못 찾았다가 급하게 발걸음을 돌리는 시민들도 있었다. 사전투표와 달리 본투표는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기준으로 지정된 투표소에서만 투표할 수 있어서다. 서초구 주민 김모(65)씨는 "우편물을 확인 못 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왔는데 길 건너 투표소로 가라고 한다"며 "다행히 공무원분이 투표소 약도를 출력해 주셔서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승엽 기자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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