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나무 보며 슬픔 삭였는데…두 번째 딸도 떠났다

입력
2024.04.20 11:00
수정
2024.04.2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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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의 10년] <5> 남겨진 사람들
찌꺼기처럼 남은 우울, 유병화의 10년
엄마는 세상과 마주하며 조금씩 움직였다

'경주 엄마' 유병화.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경주 엄마' 유병화.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그해 6월 어느 날 밤, 유원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400m 남짓 떨어진 집까지 내달리는 동안 유병화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들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 만약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활짝 열린 현관문 밖으로 운동화 한 짝만 굴러다녔다. 집 안에 불은 죄다 켜져 있는데 정작 화장실 문만 잠겼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같이 뛰어온 남편이 숨 고를 틈도 없이 신발장 서랍을 뒤져 열쇠 꾸러미를 찾아왔다. 덜커덕, 열린 문을 밀어제치자 중학생 아들이 보였다. 먹은 것을 다 게워 낸 뒤 변기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래, 내색은 안 했어도 너도 무척 힘들었겠지.’

남편은 샤워기 수전을 돌려 물 온도를 미지근하게 맞춘 뒤 뒤 말없이 아이를 씻겼다. 아들이 놀이터에서 처음 술을 마신 날이었다. 같은 일을 겪은 친구들과 함께였다.

병화 부부가 살던 안산 고잔동에서는 그해 내내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열어놓은 창틈으로 이웃집의 통곡 소리가 곧잘 들렸다. 적막한 밤 공기를 깨는 앰뷸런스 사이렌음에도 익숙해졌다. ‘누구네는 이민 갔다더라’라는 소식도 접했다. 활기찼던 도시가 1, 2년간 거대한 상갓집처럼 변했다.

2014년 5월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 희생자 합동분향소. 당시 애도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참사 직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던 유족들에게는 밤새 떠나기 힘든 공간이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4년 5월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 희생자 합동분향소. 당시 애도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참사 직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던 유족들에게는 밤새 떠나기 힘든 공간이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차라리 그때 널 붙잡고 싸우기라도 할걸

병화와 그가 사는 동네 사람들이 겪은 비극은 그해 봄 시작됐다.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는 미용실로 향하던 오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경주, 수학여행 갔어? 지금 TV 켜봐. 빨리.”

뜬금없는 말뜻을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주행 여객선 침몰 중... 진도 부근 해상’

굵은 글씨의 자막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2학년인 큰딸 이경주와 300여 명의 친구가 수학여행을 간다며 전날 밤 올라탄 배였다. 급히 딸에게 전화했지만 연결음만 이어지다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뭔가 큰일이 났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한 학교는 몰려든 취재진과 부모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진도로 향했다. 집결지인 체육관에 도착하니 경상도로 출장 갔던 남편이 반쯤 넋 나간 채로 아내를 바라봤다.

“경주가 없어… 없어.”

병화는 생존자 명단이 적힌 칠판을 네다섯 번 들여다봤다. 아이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경주, 그 두 글자를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잠수사들이 침몰 여객선 내부를 드나들며 시신을 수습하던 때 병화는 낯선 체육관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멍하니 있다가 딸과 함께했던 마지막 순간을 수시로 되감았다. 아이는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저녁, 여행 가서 입을 옷을 사야 한다고 엄마에게 연락했다. 퇴근길에 같이 가면 되겠다 싶어 경주를 미용실로 불렀다. 하지만 모녀는 그날 쇼핑하지 못했다. 별것 아닌 일로 다퉈서다. 경주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늘상 찾아가는 친구 집에 가 하룻밤을 잔 뒤 여행을 떠났다. 토라져 미용실에서 먼저 나가버린 딸이 횡단보도 앞에서 울고 있는 걸 보고도, 병화는 말없이 멀찍이 서 있었다. 왜 그랬을까. 또 싸우더라도 차라리 애를 잡고 대화할걸. 차라리 수학여행을 보내지 말걸. 차라리 조금 멀어도 다른 고등학교를 보낼걸.

큰딸 경주. 병화는 스물셋이라는 이른 나이에 낳은 맏이를 욕심부려 키웠다.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따라올 것 같아 사이버대에 등록해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딸은 공부보다 춤추는 걸 더 좋아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댄스 동아리 활동도 했다. 딸은 엄마의 마음을 따라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바라는 딸이 못 돼서 미안해.’

병화는 ‘아니다. 네가 하고 싶은 것 잘하면 된다’고 응원했다. 딸과 하나씩 찬찬히 해가면 될 것 같았는데… 이별이 벼락처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병화는 딸 경주 사진(왼쪽) 속에 나오는 동네 벚나무를 찾아 딸과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유병화씨 제공

병화는 딸 경주 사진(왼쪽) 속에 나오는 동네 벚나무를 찾아 딸과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유병화씨 제공


알고 있다… 애써도 경주는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는 영문도 모른 채 먼저 떠난 딸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했다. 여객선은 왜 침몰했는지, 해경은 아이들을 왜 구조하지 못했는지 따져 묻는 집회에 참석했다. 경주가 속했던 2학년 10반 학부모 대표와 유족 모임 심리·생계지원분과장도 맡았다. 한편으로는 화가 모세혈관을 따라 온몸에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몸이 견뎌줄 리 없었다. 어느 날 머리를 감다가 쥔 손을 펴보니 뒤통수에서 한 움큼 빠진 머리카락이 있었다. 혀가 수시로 따끔했고, 배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무심해 보였던 남편이 나선 건 그때쯤이었다. 당시 병화는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할 참이었다. 남편이 말했다.

“내가 할게. 내가 단식할 테니까 당신은 집에서 애 좀 챙기고 있어.”

웬일일까. 아내를 걱정스럽게 지켜볼 뿐 좀처럼 앞에 서지는 않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말이 반가웠다. 하지만 며칠 뒤 남편이 단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몸이 축날 대로 축난 병화를 보호하려고 한 거짓말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 상처받아 가며 애쓴다고 우리 경주가 살아 돌아와? 남은 가족도 생각해야지.”

남편의 말에 병화는 끝내 폭발했다.

“당신이 그러고도 애 아빠야? 도대체 왜 경주가 떠났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병화도 알았다. 그래, 당신 말도 맞지. 하지만 한바탕 퍼붓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웠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아파서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줄 여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남편이 술에 취해 오열하는 모습을 마주하고는 그날의 날 선 말들이 떠올랐다. 병화는 다시 한번 무너졌다. 남편도 딸이 왜 허망하게 부모 품을 떠나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남은 가족이 살아내려면 질식할 것 같아도 매일 일터로 향해야 했던 것이다. 병화도, 남편도, 아들도 아픔의 크기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병화는 2년여 전 이사 온 집에도 경주의 방을 그대로 만들어 놓았다. 진달래 기자

병화는 2년여 전 이사 온 집에도 경주의 방을 그대로 만들어 놓았다. 진달래 기자


딸의 친구들, 다들 잘 산다고 믿었다

“엄마, 저예요.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지난해 여름밤, 때아닌 전화벨 소리가 병화를 깨웠다. 경주의 중학교 친구들인 '와동 7인방'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안산시 와동에서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오랜만에 통화였다. 아이는 병화를 ‘엄마’라고 부를 만큼 각별했다. 경주가 떠난 후, 병화가 몰랐던 딸의 모습들을 정답게 들려줘 더 가까워졌다. 경주가 중학교 1학년 때 그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경주도 툴툴댈 일이 있으면 늘 그 아이를 찾았다. 수학여행 전날 밤도 둘은 함께였다. 옷을 사지 못한 경주가 수학여행에 입고 간 티셔츠와 신발도 친구에게 빌린 것들이었다. 그런 아이의 목소리에 취기가 돌았다.

"술 많이 먹었네. 그래, 조심하고. 밥 한번 먹게 집으로 와."

"네, 밥 먹어요. 우리…엄마, 사랑해요."

"그래, 엄마도 사랑한다."

잠결에 짧은 대화를 나누고 한 달쯤 흘렀을까. 부고를 받았다. 그 아이였다. 병화는 경주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지듯 아렸다. 그리고 자책했다.

'사랑한다고 전화한 건 마지막 구조요청이 아니었을까.'

한달음에 달려간 장례식장. 영정 사진 속 아이는 여전히 앳됐다. 또다시 소중한 아이를 보낸 병화 부부는 통곡했다.

사실 병화는 딸이 떠난 뒤에도 아이들을 챙겼다. 친구를 먼저 떠나보내고 느꼈을 침통한 마음이 걱정돼서다. 다만, '와동 7인방’이 스무 살쯤 됐을 때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고 아이들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했다. 어떤 친구는 대학 조교로 일했고, 다른 친구는 병원에 취직했다. 연애도 하면서 일상을 잘 꾸려가는 것 같았다. 혹여나 ‘자식 잃은 엄마’의 눈치를 볼까 봐 자연스레 거리가 생겼을 때도 억지로 다가가려 하지 않았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경주가 쓰던 물건과 경주를 담은 사진, 그림들이 방 한편에 차곡차곡 모여 있다. 진달래 기자

경주가 쓰던 물건과 경주를 담은 사진, 그림들이 방 한편에 차곡차곡 모여 있다. 진달래 기자


마음속 폭탄의 심지가 된 우울

돌아보면 지난 10년간 애도할 틈이 없었다.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비극은 기별 없이 찾아왔고, 항구에서 아이의 주검을 본 병화는 혼절했다. 눈 떠 보니 자신이 조문객을 받고 있었다. 상을 치른 뒤에는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어물쩍 넘어가려는 정부와 싸워야 했다. 국회와 청와대, 광화문광장은 물론 전국을 다녔다. 모두 경주를 위한 일이었지만 정작 경주를 온전히 추억할 수는 없었다.

애도하지 못한 감정은 ‘우울’이라는 찌꺼기를 남겼다. 침전한 그 조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폭탄의 심지가 됐다. 세월호 참사 당시 수색 작업했던 민간잠수사도 어쩌면 그 마음에 짓눌려 먼저 세상을 떠났는지 모른다. 아들을 따라갈 때가 된 것 같다는 내용의 영상을 남기고 숨진 아버지도 그랬을 테다. 그리고 경주 친구도. 서로 의지하며 사춘기를 보냈던 친구의 죽음을, 그 어린 애가 홀로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형제자매와 친구들을 수시로 만나 상담해온 사회복지사 박성현은 그때를 떠올리면 안타깝기만 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에 반응하는 방식은 아이들마다 다르죠. 다만, 어른들이 흔히 하는 당부가 영향을 많이 끼쳤어요. 이를테면 '부모 앞에서 슬픔을 드러내면 안 된다', '떠난 사람의 몫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 같은 충고들 말이에요."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앞에서 훌쩍 커버리기를 바라는 주변의 기대까지 짊어져야 했다. 어떤 아이들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경주는 여느 또래들처럼 발랄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곤 했다. 유병화씨 제공 등

경주는 여느 또래들처럼 발랄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곤 했다. 유병화씨 제공 등


"생존보고해라, 얘들아" 꼬옥 맞잡은 손

“아이고, 이 엄마가 전화했네. 몇 반이었더라.”

지난 3월, 병화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러 날을 만나는 동안 그의 전화는 수시로 울렸다. 더 이상 유족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맡은 일은 없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찾는다. 주변을 잘 챙기는 병화의 성격 때문이다. 이는 경주가 닮았던 성격이기도 했다.

병화는 경주 친구가 떠난 후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내 새끼들부터 단단히 붙들자.

"생존보고해라, 얘들아.”

병화는 와동 7인방과 평생 보고 살기로 약속했다. 슬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 마음으로 한 일이 하나 더 있다. 재난안전전문가 공부다. 진도 체육관에서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든 자신에게 죽을 쒀 먹이던 이름 모를 사람들. 공부는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한 경주 엄마의 선택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생기면 안 되죠. 그래도 또 재난이 벌어지면 현장에 가서 피해자들을 돕고 싶어요.”

10년이라는 시간이 멈춰 섰던 그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세월호 참사 10주기-그날의 책임자들, 저울은 공정했을까> 인터랙티브 콘텐츠 보기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sewol/

한국일보는 한국기자협회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을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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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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